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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조정하는 국회 638호 … 이 방에선 박희태 의장도 ‘을’

역사의현장 2011. 11. 22. 09:13

 

예산조정하는 국회 638호 … 이 방에선 박희태 의장도 ‘을’
중앙일보|김경진|입력 2011.11.2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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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계수조정소위원회가 열린 21일 정부부처 및 산하기관 직원들이 정갑윤 예결위원장실인 636호에서부터 소위 회의장인 638호실 앞까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내년 예산안에 마지막 손질을 가하는 계수조정소위원회가 열린 21일 국회 본청 638호. 불과 66㎡(20평)의 좁은 공간에 정갑윤 예결위원장과 11명의 계수조정소위원들이 높아진 실내 열기에 재킷을 벗은 채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좁은 곳에 앉아 있지만 예산안이 통과되기까지 이들은 '절대 갑(甲)'으로 통한다. 정부와 산하 기관의 예산이 소위 위원의 말 한마디에 깎이고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 638호실 안팎은 기관과 단체에서 온 사람, 지역 민원인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638호실 앞에서 가장 발을 동동 구른 사람은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의 이상직 사무처장이었다. 그는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사조직이었던 '선진국민연대' 출신이다. 이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인사다. 그는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모르쇠'로 일관했다가 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당시 한나라당 구상찬 의원 등은 "국회 생활 30년 만에 저렇게 답변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반드시 민주평통의 예산안을 삭감하겠다"고 별렀다. 결국 민주평통은 여야 의원들의 '괘씸죄'에 걸려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예산이 14억원 넘게 깎였다. 이에 '실세' 소리를 듣는 이 사무처장이 직접 소위원회 앞을 서성이며 예산 살리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날 구 의원은 "국감 때 분명히 경고했다. 어림도 없다"며 이 사무처장을 외면했다.

 박희태 국회의장도 이날만큼은 '을(乙)'의 위치다. 박 의장의 한 측근은 한 소위 위원에게 "검찰은 박 의장의 친정 아니냐. 법무부쪽 예산을 잘 반영해 의장 체면을 좀 세워달라"고 했다고 한다.

 정갑윤 위원장에겐 민원 쪽지가 하도 많이 배달돼 보좌관이 아예 한꺼번에 A4 용지에 민원 내용을 정리해서 전달했다. 문 밖에서 보좌관을 통해 쪽지로 예산을 부탁하던 재래식 민원방식 외에 새로운 방식도 등장했다. 한 위원은 "요즘은 언론에 노출되는 쪽지 대신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식으로 민원을 넣는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회의 시간 내내 정 위원장의 전화기에선 계속 진동이 울렸다. 민원을 부탁하는 전화와 문자 때문이었다. 정 위원장은 "실제 예산에 반영해 주지 않더라도 민원 전화나 쪽지 자체를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예산 증액을 부탁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민원의 강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민주당 박병석 의원은 이날 소위가 한창 진행 중인 도중에 638호실 문을 열고 들어와 민주당 의원들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예산 관련 요청 사안을 전달했다. 지역구인 대전시청의 민원을 잘 처리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소위 위원과 평소에 안면을 트지 못한 경우는 전략이 복잡해진다. 정부 부처의 경우 직접 소위 위원을 알지 못하면 다른 '갑'을 내세우는 '스리 쿠션' 전략을 쓴다. 한 소위 위원은 "소방방재청장이 나를 직접 알지 못하니 우리 지역구에 있는 소방서장을 집 앞으로 보내 예산을 부탁하더라"고 말했다.

 이런 연줄마저 없으면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다. 638호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다 소위 위원들이 정회하거나 화장실에 가기 위해 문을 열면 얼른 다가가 서류와 명함을 건넨 뒤 선 채로 간단하게 브리핑하는 방식이다. 이날 한나라당 백성운 위원은 6명의 민원인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화장실 앞까지 따라오는 바람에 난감해하기도 했다.

글=김경진 기자 < kjinkjoongang.co.kr >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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